뮤지컬 드림걸즈 - 희극과 비극 사이 by 꿀꽈배기


-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첫 관극한 드림걸즈(홍지민/박송권/최민철 캐스트)는 마치 천계영 작가의 '오디션' 같았죠. 제 3자가 보기엔 완벽한 성공이 아닐지라도 등장인물들 모두가 각자 나름의 행복과 성공을 발견해내는 진정한 해피엔딩. 그래서 전 이게 한미합작 뮤지컬 드림걸즈란 작품의 고유한 성격이라 생각했습니다. 밝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모두의 꿈에 대한 이야기. 공연을 보는 내내 한바탕 웃으며 산뜻한 마음으로 공연장을 나섰고, 이런 유쾌함을 몇번쯤 다시 맛보고 싶다 생각했어요.

- 그러나 세번째로 본 드림걸즈(차지연/오만석/최민철 캐스트)는 단단하게 응어리진 분노로 시작해 욕망으로 허덕이다가 꿈의 허망함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컴플렉스 덩어리들의 거대한 비극이었습니다. 이 끔찍하게 절망적인 극에서 그나마 웃음을 준 건 최민철 지미 뿐이었어서, 만약 지미까지 박송권 지미였더라면 블링블링한 LED 장치마저 이미 예고되어 있는 이들의 비극적 미래를 더욱 강조해주는 형국이 되었을 것만 같았죠. 극의 엔딩인 드림즈의 마지막 공연 후엔 모든 등장 인물들이 자살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 음악을 사랑했고, 드림즈와 지미 얼리를 좋아했고, 디나 존스는 더, 더 진심으로 사랑한 박송권 커티스는 디나와 함께 You are my dream을 부를 때 빛이 났습니다. 그 순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남자였어요. 그는 에피 화이트도 그다지 싫어한 것 같진 않아 보였죠. 단지 에피와의 관계를 지속하기엔 디나를 너무나도 사랑했을 뿐. 종국엔 진심으로 에피에게 사과하고 지난날의 과오도 반성하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이 커티스가 마지막에 부르는 "난 더 이상 후회는 없어. 너무나 절실했던 나의 꿈." 이란 대목은 꽤나 산뜻한 느낌입니다. 정말로 이제 더 이상 후회도 여한도 미련도 없는 목소리. 아마 이 남자는 드림즈 해체 후엔 어디 조용한 시골에라도 내려가서 죽기 전까지는 기타를 붙잡고 자기 나름대로 음악을 즐길 거예요. 왜 이 커티스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예의바르며 여유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기본적으로 박송권의 커티스는 슬럼가 출신으로는 안 보입니다. 흑인이긴 하지만 꽤 부유한 가정에서 고급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태가 난달까요. (마지막 기자 회견에서도 디나를 '아내'라고 지칭하기보단 '존스양'이라고 지칭하죠) 그러니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성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열정을 쏟아붓고 싶은 '꿈'자체인 거죠.

- 반면 음악엔 별 관심도 애정도 없지만, 매의 눈으로 디나와 드림즈가 갖고 있는 가능성을 포착해낸 오만석 커티스는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하듯 "내가 모든 걸 바꾸겠어."라 나직이 읊조리던 Steppin' to the bad side에서 뜨겁게 타오르더군요. 오만석 캐스트로 봤을 땐 그 넘버에서 오직 커티스만 보였어요. 디나를 유혹하거나 설득할 때도 그의 눈빛 속에 사랑스러운 연인을 향한 다정함이나 배려심, 떠나려는 연인을 붙잡는 간절함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이 커티스는 부모의 원수가 백인이거나(...) 적어도 성장기 한 두번쯤은 백인들에게 린치당한 기억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사회에 대한 증오심이 너무 깊어요. 디나가 이 커티스에게 '당신은 날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건 당연합니다. 오만석 커티스의 마음 속엔 뿌리 깊은 증오만큼이나 차곡차곡 쌓아온 욕망이 가득해서 디나 아니라 그 누구의 내면도 깊게 들여다볼 여유가 없죠. 그리고 커티스가 디나를 잘 모르는 것 만큼이나 디나도 커티스를 모릅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만석 커티스는, 그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의 고독한 출세욕은 인정받는 것조차 실패했죠.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씹어 삼키듯이 에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드림즈의 해체를 선언하는 그는, 그 뒤 바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해도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에미넴으로 환생하겠죠. (...)

- 그리고 네번째로 본 드림걸즈에서 만난 또 다른 커티스는...... 하느님 김승우 커티스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노래를 못 부르면 발음 교정이라도 하든가. 자기 대사에 자기가 웃겨서 피식피식 웃으면 뭐 어쩌자는 거야? 그래도 돈 주고 그런 노래를 들었다는 건 좀 자랑입니다. 이 날의 파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들려줄 때마다 1년치 위로는 너끈히 받게 되더군요. 이미 30년치 위로를 적립해두었어요.

- 홍지민 에피와 차지연 에피 캐릭터의 가장 큰 차이점은 Heavy에서 드러나더군요. 홍에피의 경우 처음엔 즐겁게 춤추며 코러스를 넣다가 TV에 디나만 클로즈업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 크게 분노하지만, 차에피는 디나만 클로즈업 되든 말든 디나가 리드싱어로 결정된 그 순간부터 이미 노래할 기력도 의욕도 잃은 상태예요. 안무도 흐느적 흐느적, 코러스 부분에선 아예 입도 뻥긋하지 않죠. '리드싱어'라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단지 조금 더 주목받을 수 있는 포지션 같은 게 아니라, 그녀라는 인간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영혼과도 같은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 홍에피와 차에피 모두 매력이 있고, 각자 잘 소화해내는 넘버들이 있지만 그래도 제가 차에피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건 I’m Not Going 장면 때문입니다. 에피가 자신을 떠나려는 커티스의 몸을 절박하게 더듬으며 "노력해봐, 노력해봐!" 라고 울부짖는 순간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던 홍에피를 잊을 수가 없어요;; 간신히 참긴 했지만 저도 웃겼거든요;;

- 지미 얼리 역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최민철 배우는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어딜봐도 몽골리안인 한국인 배우들이 흑인 역할을 소화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데 최민철 배우는 비주얼로나(..) 연기로나 노래로나 놀라울 정도로 위화감이 없어요. 그의 지미는 밝고, 유머러스하며 연인 앞에서는 어리광쟁이죠. 영화나 실제 모델과는 관계 없이, 이 지미 얼리는 커티스와 결별한 후에도 계속 노래 부르고 여자들 꼬시며 잘 살 것 같았어요. 처음 최민철 지미를 봤을 땐 그의 대사 대부분이 애드립일 거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세 번의 최민철 지미를 보면서 놀랍게도, 그의 모든 대사가 애드립은 커녕, 모두 완벽히 계산된 타이밍에서 나오는 대사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원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습도 연습실에서 혼자 몰래 한다더니 정말 그런가 봅니다. 배우란 참 재미있어요.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수천번의 연습 끝에 나온 그 고정 대사들이 매공연마다 즉석에서 나온 애드립처럼 느껴지게 만든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이 배우의 가장 큰 자산으로 남겠죠.

- 박송권 배우는 커티스 역일 때도 원나잇온리 순위소개 시 가장 또렷한 발음을 자랑한 딕션의 제왕인데, 지미 역을 할 땐 그 난해한 지미의 랩 가사가 거의 완벽히 들리게 만드는 능력을 선보이더군요. 그리고 커티스일 때와 마찬가지로 지미 얼리도 이 배우가 소화하면 어딘가 모르게 귀족적인 느낌이 나요. 관객들에게도 꼬박 꼬박 존대를 하더군요. 으하하. 최민철 지미만큼 객석을 빵빵 터지게 만드는 유머러스함은 덜했지만, 기본적으로 가창력이 뛰어나고 연기력도 안정된 배우라서 이번처럼 커버 말고 정식으로 좋은 역에 캐스팅 되면 앞으로 빛을 많이 볼 수 있는 배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조연이긴 하지만 결코 적은 분량의 넘버와 액팅이 아닌데, 원캐스팅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 정선아 배우와 김소향 배우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드림걸즈의 LED를 보고난 후론 어떤 무대를 봐도 시큰둥 해요. 특히나 시카고의 엔딩을 장식하던 그 은박지 잘라 붙여놓은 듯이 썰렁했던 무대 배경을 생각하면 누, 눙물만 ;_; 드림걸즈에서의 LED 전광판은 LED효과도 훌륭했지만 그걸 활용하는 방식이 독창적이고 세련되어서 더욱 인상 깊었죠. 그다지 크지 않은 샤롯데 무대 위에서 LED 판을 대각선으로 비틀어 극 중 무대과 백스테이지 공간을 분리하고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모습을 관객에게 실시간으로 함께 보여주는 연출은 처음 봤을 때 정말 신선했어요. 단지 이제 이게... LED가 워낙 시각적인 충격을 주다보니 반대로 LED가 사라진 무대, 이를테면 2막에서 절정을 담당하고 있는(...) Listen 넘버에서의 썰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문제지-_-;; 리슨 볼 때마다 느낀 거지만, 그 전 원나잇온리에서의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스태프들 모두 리슨에선 지쳐 나가떨어진 것 같아요. 아아, 우린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나머진 너희들(에피와 디나)에게 맡기마, 풀썩- 이런 느낌이랄까. 미국에서 공연하게 될 버전에선 원나잇온리 이후 전개는 꼭 수정하기를.

- 드림걸즈를 나중에 한국에서 또 올리게 된다면 에피 역 할 배우들은 꽤 있을 것 같은데, 디나 역 할만한 배우는 정선아 배우 외엔 딱히 없을 것 같아요. 세상에, 그런 몸매의 소유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자태는 비욘세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았어요. 언니, 그러니까 루시 일번만 더. 응?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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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vanilla 2009/08/16 23:36 # 답글

    에미넴에서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오만석이 좀 우울한 분노 정서가 깊죠(...) 응? 그런데 청년 데트의 모험 5권이 눈에 띄네요. 사러가야겠어요+.+
  • 꿀꽈배기 2009/08/17 01:10 #

    초창기의 오만석 커티스는 어떤 캐릭터였는지 몰라도, 막공 즈음의 오커티스는 예전 신돈에서의 원현스님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더라고요. 마지막 기자회견 할 땐, 신돈 마지막회에서 불가사리 흙인형을 만들던 원현의 이글이글 눈빛이 그대로 -ㅠ- 데트의 모험 5권은 나온지 꽤 되었답니다~ 이러는 저도 아직 사진 못했지만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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