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용극에 가까운 형태를 띄고 있었고, 철저히 이미지 위주로 표현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돈 주앙 오리지널 제작자였던가요. 돈 주앙 한국 라이센스 공연을 기념하여 진행한 인터뷰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뮤지컬을 굳이 뮤지컬이라 부르지 않고 정형화된 뮤지컬을 만들거나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음악과 춤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의 한 종류일 뿐이다 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뮤지컬 바람의 나라를 보면서 그 인터뷰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이 작품도 제가 지금까지 봐 온, 그래서 제가 머리 속으로 그리고 있던 뮤지컬의 고정된 형태에선 크게 벗어나는 작품이었어요. 한 가지 재미있었던 건, 뮤지컬 바람의 나라가 형식상으로는 무용극의 형태를 띄고 있음에도 극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역동적이라기보단 정적이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는 거였죠. 그야말로 '정중동'이랄까요. 무대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무휼의 독무씬 같은 경우 연속성을 띈 동작이라기보다는 인체의 근육이 가장 아름답게 수축된 순간을 컷 단위로 잘라 보여주는 회화 작품에 가깝다는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직접 극을 보기 전엔, 바람의 나라 원작이 가진 방대한 내용과 복잡다단한 캐릭터들의 심리 묘사를 2시간 짜리 공연에서 어떻게 살뜰히 설명하고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컸던 게 사실입니다. 이 난제를,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캐릭터들의 압축된 이미지와 극을 관통하는 주제의 집중을 통해 풀어냈네요. 이 작품의 배우들은 친절한 대사를 통한 설명 없이도, '이미지'로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해냅니다. 부도를 향해 나아가는 무휼의 고독한, 그러나 결코 제자리에 멈추어서지 않는 발걸음.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 웅크린 채 자리잡았던 모습 그대로 최후를 맞이하는 호동의 둥글게 만 등. 팔을 들어 겹겹의 천으로 자신의 본 얼굴을 가린 채 무휼을 갈망하는 이지의 눈빛, 그리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이미 인간은 아닌 신체 비율의 괴유(...) 등등. 이런 식의 이미지화는 맨처음의 오프닝 씬과 호동의 마지막을 설명하는 엔딩씬에서 실제 원작의 일러스트와 무대 위 배우를 오버랩 시킬 때 더욱 효과적으로 연출되었습니다. 김태훈 배우가 분한 호동은 분명 제 마음 속 원작의 호동과는 하늘나무의 위/아래만큼이나 차이가 큰 캐릭터였음에도 불구, 원작 일러스트와 오버랩 된 마지막 씬에서의 태훈 호동은 원작의 호동이 그 자그마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슬픔과 애한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모습이었죠. 그러니까, 이 작품은 이렇게 글로 주절주절 설명하는 것보다 위의 공연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는 것이 극과 극 중 캐릭터들의 관계성을 더욱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최대한 절제와 축약의 미를 살린 이 연출에서 가장 돋보인 캐릭터는 역시 무휼. 보기 전엔 아무리 고영빈씨가 이지나 연출의 총애를 받는 배우라고는 해도 양준모씨가 해명이면 원작보다 더 해명 비중이 커졌나보네?! 싶었거든요. 근데 역시 무휼은 무휼이고, 바람의 나라는 무휼의 이야기였습니다. 대사를 최대한 지양한 채, 때로는 독무를 통해 때로는 부도를 향해 걷는 뒷모습을 통해 무휼의 모든 감정과 꿈과 그의 부도를 표현해내는 연출은 신선하고 또 흥미로웠어요. 원작에서도 연이 죽은 후에는 기껏해야 '내 꽃 우리 연이' 정도의 대사 무한 구간반복(...)밖엔 없는 과묵한 캐릭터이니만큼 침묵과 여백이 넘치는 연출이 무휼이란 캐릭터에 상당히 잘 맞더군요. 고영빈씨의 워킹이 우아하다는 평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 고독한 기품이 넘쳐흐르는 뒷태와 워킹이었습니다. 사실, 무휼은 누가 해도 '무휼'이 안될 거야 아마... 라고 생각했었는데 놀랍게도, 고영빈씨의 무휼은 제가 지난 10여년간 원작을 지켜봐오며 생각했던 무휼의 이미지와 상당히 닮아 있더군요.
혜압도 좋았죠. 이지와 더불어 이 극에서 유일하게 노래를 하는 배우로군 하는 생각도 들었고-_-;; 노래를 부를 때나 대사를 할 때의 발성이 굉장히 좋은 배우라, 극의 서술자 역할이기도 한 혜압 캐릭터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무휼의 독무씬에서 읊는 설명조의 대사라든가, '저 부도로' 같은 넘버에서 치는 대사의 톤은 전체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더군요. 작품 자체가 '움직임'이 주는 아름다움 보다는 제 자리에 그림처럼 멈추어 서 있는 캐릭터의 포즈와 각각의 캐릭터들이 서 있는 위치, 느릿하게 교차되는 동선에서 오는 '정지' 상태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혜압의 독특한 대사톤과 어우러져 노(能) 같은 일본 전통극의 느낌마저 가끔씩 받았습니다. 다만 극의 전체적인 느낌은 그러한데, 중간 중간 한국식 마당놀이를 차용한 듯한 장면(배극이 등장하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현대 무용 느낌의 전쟁씬 군무가 끼어드니 대체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등이 되긴 했지만요. 이건 뒤에서 다시 한 번 얘기하도록 하고-
이지는 원작의 이지보단 좀 더 순정적이고 애절한데다가 독기가 빠진 이지였지만 뭐, 그것도 나름 괜찮더군요. 기본적으로 음색과 발성이 좋은 배우라 이지의 솔로 넘버인 '모래꽃'이나 '사랑하나 봐' 같은 넘버에선 저처럼 원작에서의 이지가 아웃오브안중이었던 독자마저 그녀의 노래에 집중하고 그녀의 감정에 동화될 수 있었습니다. 무휼과의 초야씬에서 이지가 들고 있는 천이 꼬이는 바람에; 동선이 엉킬 뻔 했는데 두 배우 모두 당황하지 않고 잘 수습하더군요. 도정주 배우는 앞으로 다른 작품에서도 챙겨 보고 싶네요. 반면 연이는 그냥 꽃같은 연이였어요. 만화 속에서도 참 사람같지 않은 백치미가 줄줄 흐르던 애였는데 그걸, 그 3인칭으로 본인을 지칭하는 대사를 실사의 사람이 연기하자니....... 배우 탓은 아니에요. 아닐 겁니다. 김진이 나빠. (...) 괴유 역의 김산호씨는 몸이 좀 둔해보이긴 했지만 양손 위에서 단검을 정말 잘 놀리더군요. 일단 앞서 짧게 언급했듯이 그냥 서 있어도 같은 인간족의 비율이 아닌지라, 첫 등장씬에서부터 원작을 전혀 모르는 관객이라 할 지라도 '아, 쟤는 인간은 아니구나'하고 금세 깨달을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얼굴도 아닌, 비율이 그 자체로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이런 케이스는 정말 드물 겁니다. 헛헛. 2막 시작을 장식하는 전쟁씬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배우이기도 했는데, 그 좋은 몸을 열심히 놀리며 열연하는 김산호 배우를 보고 있으려니 저 역시 절로 눈길이 머물긴 하더군요. 그 외엔 워낙 대사도 없고 해명, 세류등과 함께 부르는 넘버에서의 비중도 적어서 뭐라 할 말이. 음. 게다가 함께 나오는 세류 역의 배우가 너무 노래를...... (이하 생략) 이어서 상대적으로 가창력이 좀 발전한 것처럼도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저는 임병근 해명으로 봐서 해명-세류-괴유가 함께 노래를 부를 때 가창력 차이를 그리 크게 느끼진 못했는데 양준모 해명이었다면 이 3중창, 과연 성량 밸런스가 맞기나 했을까 싶은 의문은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았죠. 세류는, 네. 창을 잘 쓰는 배우였습니다. 예쁘고, 창을 몹시 잘 돌렸고, 그게 끝이었어요.
아무튼 어느 정도 원작의 캐릭터와 뮤지컬에서의 캐릭터를 얼추 (긍정적인 쪽으로)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던 인간족-_-캐릭터들과는 정 반대로, 신수들 및 천계 캐릭터들 쪽은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던 병아리 등장씬. 헉! 와이어 달고 진짜 날잖아?! 전 그냥 몸 가벼운 배우가 통통 뛰고 구르면서 연기할 줄 알았단 말이죠. 게다가 그 가발! 마치 피구왕통키 같던 그 금빛 가발! 원작의 병아리는 소시는 커녕 S.E.S도 없던 시절, 국민요정이나 다름없던 누가 봐도 귀여운 미소녀(년)였는데 극에서의 병아리는 피구왕을 꿈꾸며 불꽃슛을 연습하는 초등 3학년생 같은 머리 꼴을 하고 있으니 '병아리야, 병아리야.... 웃지 마.' 하던 호동의 대사에 완벽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암수 원플러스원 신수인 봉황이라 해도 제가 그 꼴을 봤더라면 '왕자님이 웬 비행청소년이랑 연애질을 하고 있어요!'라 무휼한테 꼰질렀을 듯. 아무리 생각해도 새엄마 뒷담화 까고 다니는 불효자 왕자님 설보다는 '어이쿠 호동왕자님 호감가는 모양새' 설이 더 설득력있는데... 그리고 병아리 등장에 앞서 저로 하여금 이 극의 정체성을 판단하는데에 극심한 혼란을 가져온 문제의 그녀, 가희. 아아아아... 이건 진짜 연이와 더불어 실사의 배우가 하면 안 되는 캐릭터로구나. 게다가 이 배우 딕션은 또 왜 저래요. 제가 진짜, 하희라떼며 붕가하겠습니다며 온갖 발음 안 좋은 탤런트들의 드라마 연기에 충분히 단련된 반고리관의 소유자인지라 웬만한 딕션은 다 알아 듣거든요? 근데 가희 대사는 거짓말 안 하고 뭐라 그러는건지 1/10도 못 알아먹은 것 같아요. 심지어 난 원작도 봤는데!! 거기에 그 롯데월드 퍼레이드 삘 나는 의상이 더해지니... 음..... 여담이지만 가희 첫등장하는데 전 진짜 산호괴유가 가희를 질질 밀면서(...)나오는 줄 알았어요. 퇴장할 때보다 다행히도 자동장치더군요. 언니 그거 입으려면 고생 좀 하시겠네요. 근데 다리보다는 혀에 쥐가 난 것 같아 보이셨고. 네번째로는 청룡... 그래, 이건 그냥 병아리와 한세트로 치자.
제가 뮤지컬 바람의 나라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극의 전체적인 밸런스였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굉장히 진중하고, 고요하며, 정적인 극인데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이질적인 씬들ㅡ예컨데 배극의 마당놀이삘 나는 이지 소개씬이라든지 MC병아리의 폭풍랩이라든지ㅡ 때문에 극에 대한 몰입이 툭툭 끊기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장면들이 극의 전개상 꼭 필요한 장치였다라면 또 납득을 하겠지만, 이 작품이 대장금 시즌2처럼 본격퓨전사극뮤지컬을 표방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왕과 부도에 대한 풍자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저 장면들이 등장해야 할 이유를 못 찾겠더군요. 굳이 랩이란 형식까지 차용하지 않아도 '모래꽃'의 브릿팝적인 느낌, '저 부도로'의 후주 멜로디를 지배하는 태평소 연주, '망무기 굿'의 살풀이 안무 등 노래와 안무, 의상까지 모든 면에서 전통과 현대, 한국적인 것과 이국적인 것을 적절히 섞어놓은 효과는 충분하다 느꼈거든요.
조금 더 나아가면 사실 이 뮤지컬에서 배극이나 병아리, 가희의 비중은 이야기 전개 상 지극히 미미한 것이라 조금 더 과감히 줄여버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원작에서의 병아리는 무휼의 청룡과 상극인 신수로서 무휼과 호동 사이에 놓인 숙명적인 '살'을 상징하는 것 외에도, 사비와 호동의 관계에서 역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갈등 장치인데 뮤지컬에선 사비와 낙랑국 쪽은 아예 제외해버린 상태라 상대적으로 병아리의 역할이 좁아졌죠. 가희 역시 그 짧은 솔로 넘버를 통해 가희와 괴유가 갖고 있는 원래의 스토리를 풀어내기는 역부족으로 보였습니다.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가희와 괴유의 스토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요? 극을 보며 이 부분은 정말 원작 팬서비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배극은 말할 것도 없고요.
유리왕과 해명, 무휼, 그리고 호동으로 이어지는 부자 간의 살, 원작에서 이 '살'이라는 관계성은 비단 바람의 나라 뿐만이 아니라, 김진 작품들을 관통하는 테마인 '살부(殺父)' 코드를 이해하는 중추적인 개념이죠. 뮤지컬 바람의 나라에선 '살'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강조하기 보다는 무휼과 호동의 서로 다른 이상- 즉, 아버지와 아들이 꿈꾸는 각기 다른 부도의 대립 구도를 전면에 내세워 '함께' 공존할 수는 없는 무휼과 호동의 숙명적 관계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부도를 꿈꾸며 무대 뒤에서 객석쪽으로 걸어오는 무휼로 시작하는 이 극은 결국 호동 홀로 남겨진 채 다른 모든 캐릭터들과 함께 부도를 쫓아 객석에서 무대 뒷쪽으로 걸어가는 무휼의 뒷모습으로 끝이 나죠. '부도'라는 테마의 강조는 2시간이라는 짧디 짧은 공연 시간 안에서 극이 취할 수 있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도'라는 테마의 집중을 통해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설명해낸 무휼, 호동, 해명, 혜압에 비해 상대적으로 캐릭터가 붕 떠버린 느낌이 드는 연, 이지, 괴유 등의 케이스는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특히 원작보다 독기가 빠지고 무휼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강조된 연기를 펼친 도정주 이지의 경우, 대체 왜 호동을 모함해서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는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질 않아서, 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호동의 죽음이(그 장면의 연출 자체는 대단히 임팩트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 급작스러운 전개만큼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그에 앞서 무휼-연-호동으로 이어지는 관계성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부터가 문제였죠. 원작에서 연은 무휼과 호동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동시에, 두 남자 사이를 갈라놓는 갈등제이기도 했습니다. 무휼이 자신의 아들인 호동에게 아버지로서 온전한 애정을 쏟지 못하고 애증을 표현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죠. 왕과 아버지로서는 자신과 전혀 다른 부도를 품고 있으며 신수마저 자신의 신수인 청룡과 상극인 봉황을 갖고 있는 후계자에 대한 경계심이고, 남자이자 남편으로서는 일생에 사랑했던 단 한 여인인 연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원인이자 그 죽음의 결과물인 아들에 대한 원망과 연민이죠. 게다가 호동은 연과 외모까지 쏙 빼 닮았으니, 무휼만이 아니라 이지에게도 호동은 필연적 애증의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휼과의 초야에서 이지는 "추억은 그녀와 함께 묻고, 사랑은 제게 주세요."라고 말하지만 '살아있는 추억'인 호동이 무휼과 이지의 곁에 존재하는 한 연은 결코 무휼에게 있어 묻을 수 있는 죽은 추억도, 죽은 사랑도 아니게 되죠. 뮤지컬에서도 호동이 연의 아들이기에 빚어질 수 밖에 없는 무휼-호동-이지의 갈등이 조금 더 친절하고 명확하게 그려졌다면 이지, 연의 캐릭터도 좀 더 살아나고 단지 부도의 대립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무휼과 호동의 관계성도 보다 깊게 연출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위와 같은 아쉬움과,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전쟁씬에서의 몇몇 난해한 안무들(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친다든가-_-;;) 덕분에 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도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충동은 거의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가지 기분이 좋았던 건, 극을 보는 내내 제작진과 배우들의 원작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일 거예요. 한국 만화계를 통틀어 '바람의 나라'만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여러가지 매체로 새롭게 태어난 작품도 드물죠. PC통신 시절 머드게임에서부터 시작해, 드라마, 뮤지컬에 모바일 게임까지. 원작의 연재 기간만큼이나 여러 매체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또한 길고 우여곡절이 많았기에(정식 판권 계약이 아닌 표절 이슈도 두 번이나 있었고) 뮤지컬 바람의 나라 또한 아무리 원작자인 김진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는 하나, 만화 원작의 뮤지컬이란 선례가 많지도 않은 상황에서 과연 괜찮을까 싶은 우려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극 전개나 구성상 아쉬운 부분들과는 별개로, 아니 오히려 연출자가 원작에서 너무나 사랑하는 장면들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고 싶은 욕심으로 극의 전체적인 구성이 흐트러진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몇몇 씬들에서 원작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흘러넘치는 걸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만화라는 인쇄매체를 통해 여러 독자들을 울고 웃게 만들어 준 작품을,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도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라 마무리를 하고 보니, 윙크에서 연재 중인 '춘앵전'이 신시뮤지컬 컴퍼니와 판권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군요. :)
극과 별 상관 없는 사족들.
1. 요번 바람의 나라를 통해서 서울예술단 소속의 배우들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춤과 노래 실력를 보고 나니 서울예술단 출신이었던 08-09시즌 지킬의 김수정 배우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드림걸즈 하게 놔두지 왜...
2. 이 날은 마침 마이클 잭슨이 네버랜드로 영영 떠나버린 날이라, 추모의 뜻으로 호동왕자가 병아리 앞에서 Thriller 댄스를 췄지요. OTL
3. 바람의 나라는 모든 넘버들이 좋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연주곡들이 참 좋은데, 저 같은 경우 2막의 하이라이트인 고구려와 부여의 전쟁 씬에서 흐르는 곡을 드라마 '하얀거탑'의 The Great Surgeon으로 먼저 들은 케이스라 익숙한 스트링 세션의 전주가 시작되자마자 무대 위로 장준혁 교수가 걸어나와 간, 신장, 췌장 동시 이식 수술을 집도해야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4. 2층에서 관극했더니 조명 연출과 무대 바닥에 그려져있는 12궁도가 잘 보였습니다. 황도12궁의 경우 처음엔 배우들의 동선을 지정해주는 야광 마킹인가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마킹이 많다? ;; 싶더니만 암막 때 잘 보니 별자리더군요. 엔딩씬에서 조명만으로 바다를 표현해내는 연출은 실제로 보니 감탄스러웠습니다. 무대가 깊으니 이런 방식의 연출도 가능하네요.
5. 가장 많이 본 앙상블은 역시 지킬이지만 지킬은 딱히 군무랄 건 없어서 비교하기가 좀 어렵고 작년의 클레오파트라나 돈주앙, 올해 본 대장금, 시카고, 드림걸즈에 이 바람의 나라까지 생각해봐도 음...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맞는 군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새삼 느껴집니다. 만화 '스바루'에도 나오듯이 서로 키와 팔길이가 다른 무용수들이 같은 높이, 같은 간격으로 뛰어오르고 구르고 팔을 휘두르려면 단순히 안무를 정확히 외우는 차원을 넘어, 키가 5cm 작은 사람은 5cm만큼을 더 뛰어올라야 하고, 팔이 5cm 짧은 사람은 골반이 고정된 상태에서 허리라도 틀어서 팔을 5cm 더 내밀어야 하는 기술적/체력적인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거니까 말이죠. 그래서 군무가 생명인 발레의 경우엔 일부러 최적의 신체조건을 맞추어 놓고 거기에 들어맞는 사람만을 단원으로 뽑는다고도 하고. 그러니까 결론은ㅡ 태연이랑 수영이가 그 키차이를 극복하고 '똑같이' 추게 만드는 SM 너님 좀 짱. 뮤지컬계에서도 SM의 군무 트레이닝 노하우는 좀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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