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8:00 정상윤/김우형
부제 '사고뭉치 리차드와 살림꾼 네이슨'

이 3월 25일 공연까지만 해도 둘의 캐릭터에는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 네이슨은 여전히 60%의 무서움과 30%의 사랑스러움과 10%의 암흑물질(...)로 형성된 캐릭터였고, 리차드는 굳이 쟬 어떻게해서든지 이해해보겠다는 의지를 버리고(..) 그가 보여주는 몇가지 특성에만 집중해서 보면 '쟨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애니까'하고 납득이 가는 싸이코패스 캐릭터였어요. 이 리차드의 일관성은 '일관되게 일관성 없음'에서부터 비롯되거든요.
상윤 네이슨의 심의관 씬에선 필석 네이슨의 그것처럼 불꽃 튀는 긴박감이 느껴지진 않아요. 필석 네이슨은 때론 노골적으로 그들의 말을 비웃어 가면서, 때론 지금 당장 멱살이라도 잡아 쥘 것처럼 심의관들과 격렬한 대립각을 세워 연기를 하는데 상윤 네이슨은 대체로 심의관들의 말에 순응하며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를 심의 내내 유지하거든요. 오직 딱 한 번- 나와 그가 함께 했던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이 '변태적인 살인행각'따위로 모욕당한 그 순간엔 리차드가 배신했을 때에도 내비치지 않았던 살기 어린 눈빛을 보이지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윤 네이슨의 심의씬에선 기저에 낮게 깔려있는, 신경을 거스르는 묘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상윤 네이슨이 진술하는 건, 분명 진실이에요. 때때로 그 순간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 괴롭게 미간을 찡그리며 추억을 상기시키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단지 심의관들이 물어본 질문의 표피에 대한 진실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뭐, 언뜻 들으면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는 것으로 들리죠.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묻고 답한다는 느낌이랄까. 예컨데 심의관이 묻는 '양심'은 범죄행위에 대한 양심을 뜻하지만 이 네이슨이 답하는 '양심'은 나와 그가 함께 저지른, 겉으로 알려진 범죄행위가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리차드에게 행한 행위에 대한 양심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상윤 네이슨의 가석방이 결정되는 순간 '아니얏, 멍청이들아! 이대로 풀어주면 안돼. 아직 뭔가가 있어! 진짜로 감추고 있는 뭔가가!!'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제가 너무 멀리 간 걸까요... 아냐. 근데 진짜 상윤 네이슨에겐 뭔가가 있어요.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당신의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는 심의관의 말에 잠시 생각한 뒤 미묘한 표정으로 '네에...'(←이건 거짓)라고 답한 뒤 유일하게 죄책감이랄까 일말의 후회 같은 감정을 얼굴에 내비치는 thrill me finale까지 이어서 보면 더욱 더 간담이 thrill해지는 무언가가.
우형 리차드는 조금씩 나이를 먹긴...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처음보다 감정이든 모션이든 점차 정돈되어가고 있는 건 느껴지는데 베이스로 깔린 '생각 없는' 싸이코패스 캐릭터 자체는 굳건한듯. 초창기 공연과 비교하면 랜섬노트 쓰면서 아버지 얘기할 때 약간은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든지, 웨이투파에서 '살고 싶으며언~ 주소를 불어 이 새끼야아~'(아, 난 이거 진짜 좋았는데)라고 하면서 죽을만큼 즐거워한다든지 하는 모습 등은 확실히 변화가 생겼지만 전반적으로 시큰둥하게 말하는 톤이라든가 살인도구 갖고 놀면서 마냥 푹 빠져 즐거워 하는 모습, 가족에 대해 컴플렉스는 커녕 진지한 관심 1그램 조차 없어보이는(설령 내재되어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모습같은 건 제 보기에 첫공 때부터 쭉 변함없어요. 전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고요. 여기서 갑자기 이전에 해온 연기처럼 컴플렉스와 자기애가 가득하고 타인의 감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캐릭터가 되어버린다면 더 혼란스러울 듯. 그리고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다층적 캐릭터를 연기해 온 김우형 배우인 만큼 이번만은 이렇게 약간 빈듯한 구석이 있는 캐릭터를 계속 밀고 나가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모처럼 맡게 된 조연이니까 부담도 없고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비단 우형 리차드 뿐만이 아니라, 저는 항상 주캐릭터과 부캐릭터의 구별은 확실하게 두는 편이 '극'을 위해 좋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네이슨이 명백한 주연인 이 극에서 리차드는 너무 복잡하지 않은, 딱 이 정도 선의 중량감이 알맞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날 공연에선 슈페리어 때 소품 실수가 있었죠. way too far에서 리차드가 퇴장할 때 밧줄, 재갈, 쇠막대기, 염산병- 이렇게 소품 네가지 챙겨서 가방에 넣은 후 백스테이지에 준비해놓지 않나요? 그랬다가 로드스터 끝나면 바로 챙겨들고 등장하면서 슈페리어 시작- 이렇게 할 것 같은데 뭐가 문제였는지(가방 들고 뛰쳐나오다가 가방이 열렸다거나 해서 염산병이 굴러 떨어졌나?) 등장 자체도 진짜 아슬아슬하게 노래 도입부에 겨우 맞춰 나왔는데 막상 등장하고 보니 염산병을 안 가져온 거예요. 전 처음엔 몰랐는데 상윤 네이슨의 얼굴에 약간 당혹의 빛이 돌더니만 우형 네이슨이 혼자 노래부르고 있을 때 무대 뒤로 후다닥 들어가서 염산병을 챙겨오더군요. 여기서 두 배우의 위기대처방식의 차이점이 보여서 재미있었어요. 상윤 네이슨은 '해야할 건 어떻게 해서든 빠트리지 않고 하는' 타입인데 우형 리차드는 '없으면 없는대로' 처리할 모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상윤 네이슨이 염산병 가지러 간 사이, 바로 그 염산병이 필요한 모션(상자 위에 올라가서 '귀여운 어린애 누워있어'부르며 염산 뿌려보이는 시늉하는)을 했어야 했는데 걍 뿌려보이는 모션까진 안 하고 스무스하게 넘기더군요. 꽤 당황했을 법도 한데 두 배우 모두 동요없이 마무리 잘 하는 모습, 보기 좋았습니다.
아무튼, 상윤 네이슨이 예정에도 없던 염산병 주워오게 만들었던 게 쫌 미안했던건지 뭔지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뺨을 때리는 게 아니라 슬쩍 터치만 하면서 밀더군요. 얘기를 듣자하니 전날인 3/24 공연에서도 살짝 때렸다던데, 때리는 게 아니라 살짝 미는 정도로 할 거면 그냥 하지 말죠? 할거면 제대로 해야지 저게 뭐야. 넘 세게 때리면 아플까봐 망설이면서 '일부러' 약하게 때린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네이슨과 리차드가 아니라 정상윤과 김우형으로 보인단 말이죠. (우형 리차드는 그 순간 절대로, 네이슨을 배려하거나 그에게 살짝 주의만 줄 요량으로 약하게 때릴 캐릭터가 아니니깐) 캐릭터가 아닌 배우가 노출되는 건 없느니만 못한 애드립.
이 페어는 공연 내용 외적으로도-소품 실수 같은 거- 얼척없이 사고 치면서 다니는 리차드를 네이슨이 열심히 수습해주고 다니는 느낌이 이어져서 참 ㅋㅋㅋ 유독 염산병이 문제네요. 8일 밤공 땐 염산병을 엉뚱한 데로 던져서 네이슨이 무릎으로 쪼로록 기어가 데굴데굴 굴러간 염산병을 바쁘게 주워오게 만들더니... 8일 낮공에선 쓰릴미 씬 도입부에 문 열어놓고 등장해서 리차드가 가방 뒤지고 있는 동안 네이슨이 대신 가서 문 닫아줬죠 낄낄낄.
3/27 8:00 정상윤/김우형
부제 '좋은 연기는 모든 실수를 초월한다'

이날 공연에선 why부터 맨 마지막 thrill me까지, 네이슨과 리차드 모두 평소와는 묘하게 다른 대사톤, 감정선으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랄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겉으로 보기에 정상윤 배우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보인다 싶더니만 이전 공연에서 보여주던 유약한 표피 이면의 섬뜩한 미소가 아니라 어딘가 초췌하고 힘이 빠진듯한 모습이 계속 되었어요. 텐션 자체가 떨어졌다기 보단 뭐랄까,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 약간 붕 떠있는데, 근데, 그게 또 나름의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완전히 슬픔에 잠긴 모습도 아니면서 애잔하고 쓸쓸한.... 게다가 리차드까지 이전에 '아아, 저 대사톤은 어색해. 오글거려. ㅠ_ㅜ'라고 생각했던 부분의 대사톤들이 모조리 다!! 바뀌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리차드가 나이를 먹거나 인격이 성숙해지거나 철이 든 건 절대로 아닌데(...) 오버한다 싶었던 부분은 차분하게, 차분하게 연기했던 부분들은 조금 더 그 나이또래다운 치기를 담아 연기하더라고요.
특히 afraid는 최고.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afraid 때는 항상 그의 방과 나의 방을 번갈아가며 보느라고 눈알이 빠질 것 같은데(...) 이 날은 저도 모르게 그의 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 리차드는 다른 넘버들 만큼이나 afraid도 되게 단순하죠. 범죄에 대한 뉘우침이나 죄책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네이슨에게 이런 모습을 진짜진짜 보여주기 싫은 것도 아니고(뭐 5센티리터 정도는 그런 허세도 있겠지만 네이슨이 쪽쪽 빨아먹는 아이스크림만큼이나 머리 속을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그냥- 진짜 단순하게 죽는 게 싫고 설령 산다 해도 감옥 안에서 평생을 '통제받는다'는 게 두려운 거니까요. 그래서 그 대형견처럼 불쌍한 눈망울을 보고 싶으면 어이구 쯧쯧-_- 싶긴 하지만 그가 느끼는 공포나 절망감이 맘으로 잘 와닿진 않았는데 말이죠.
'모든 게 끝난 거야!'하면서 양 옆으로 펼치고 있던 손을 바닥에 쾅! 치는데 그 순간 '아, 정말로 [끝났]구나.'하는 리차드의 절망감이 확 와닿더군요. 마치 내안경/진정해에서 정네이슨이 '우리라고? 아니, 너야.'라는 리차드의 말을 듣고는 배신감>절망>허탈의 3단계 표정변화를 거쳐 무언가를 '결심'한, 굳은 얼굴로 수화기를 탁- 내려놓을 때, '아, 저 수화기와 함께 이 네이슨의 리차드에 대한 마지막 신뢰와 기대감 또한 마음에서 내려놓아졌구나.'하는 느낌이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네이슨은 이런 게 참 잘 느껴지죠) 사랑, 연민, 슬픔, 분노, 배신감... 이런 식의 일상적인 감정은 일반적인 관객들도 삶 속에서 충분히 느끼고 있는 경험적 감정이기에 표정이나 목소리 연기만 잘하면 충분히 공감을 살 수가 있죠.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절대적인 공포, 살인같은 범죄에 대한 충동적 희열, 지배와 통제에 대한 강박 같은 말초적이고 비일상적인 감정은 보통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해본 적이 드물기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는 게 아니라, 관객 각자가 상상력을 동원해야하는 것들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연기를 할 땐 연기자도 일상적인 표정, 목소리 이런 걸로만은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그 캐릭터가 처해있는 상황, 느끼고 있는 감정을 더욱 확실하게 전달해주기 위해 '연극적 모션'이 배로 추가가 되는 건데요ㅡ이런 식의 연기는 진짜 캐적절과 캐어색이 종이 한장 차이라-_-;;ㅡ 바로 이 점 때문에 올해 리차드들이 특히나 더 고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날의 afraid는 그 난제에 대한 교본이 될만한 연기였죠.
제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포스팅으로 어떻게 풀어놓을 수 있겠냐만, 이 날 저는 처음으로, 공연이란 걸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냥 글썽글썽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르륵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킵유어 때부터 이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온몸이 간질간질해. 이러다가 나 진짜 울어버릴지도 몰라... 란 생각이 들었는데(이 정도 두근거림까진 지킬 때도 몇 번 느껴봤음) life plus 99 years를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더군요. 문자 그대로 눈물이 앞을 가리고 턱이 덜덜 떨려와서 사실 이 부분 배우들의 표정같은 건 죄다 놓쳤습니다. 근데 굳이 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만 들어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정말 신기한 건 이 날 공연이 절대로 완벽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대사 씹고 그런 게 아니라 극이 진행되는 도중, '배우'가 노출되는 대형 사고가 있었죠. 위와 같은 감정선으로 인해 전 정말 극에 푹 빠져 몰입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내안경/기다려에서 리차드의 배신으로 인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바로 이 순간ㅡ
네이슨 : "두고 온 게 분명해 내 안경. 수천개라도 저건 내 거야."
리차드 : ".........................기다려....보자....................."
(원래가사 : "며칠 더 기다려 보자, 잠잠해질 때까지. 팀을 위해선 하나를 희생시켜야만 해.")

기다려……? 뭘……? 언제까지……???
제가요, 그냥 그 캐릭터로서 대사 버벅거리는 건 신경 안 쓰는데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가 대사나 가사를 통으로 날려먹어서 그 때까지 견고하게 구축되어있던 무대 위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구멍이 뻥 뚫려버리면 정말 화내거든요.... 바로 2월 15일에 그랬었거든요........
그런데ㅡ
이 날은 화가 안 났어요!!!!!!!!!!!!!!!!!!!!!!!
물론 순간적으론 읭?? 방금 뭐가 이상했는데?? 하긴 했는데, 그 실수로 인해 무대 위 세계가 허물어지진 않았죠. 배우들도 정신줄 놓지 않고, 아니 오히려 그 이후 더 캐릭터에 몰입해서 연기했고요. 이것 뿐만이 아니라 thrill me 넘버 직후에 마이크 음향 사고도 하나 있었지만 그것도 순간적으로 으헉? 해버리고는 곧바로 리셋.
그 날 그 무대 위엔 그냥, 네이슨과 리차드가 있었어요.
모든 실수조차 떠오르지 않게 만드는.
이 날의 커튼콜에선 쓰릴미 보며 처음으로 기립하고 싶다! 란 충동으로 가득했는데 킵유어 때부터 줄창 울어서 아이라인 번진 게 부끄러워(...) 차마 실행에 옮기진 못했습니다. 그치만 마음만은 기립했답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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