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아름다우며 놀랍고 멍청한 꿈 by 꿀꽈배기

저는 꿈을 거의 매일, 아주 스펙터클하게 잘 꾸는 편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매일밤 십수개의 꿈을 반드시 꾸고, 단지 사람 별로 깨어난 후에도 꾸었던 꿈을 기억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설도 있으니 잘 꾼다기 보다는 잘 기억한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여하간, 그 중에서도 저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꿈의 유형은 이런 거죠.

길어지니 접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TV드라마나 영화 혹은 책을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몇 주 전 꿈속에서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를 보고 있었죠. 꿈 속에서는 그게 신작이라기보다는 개봉한지 좀 된, 그러나 전 그제서야 DVD를 빌려서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참으로 박찬욱 감독스러운, 참신한 오프닝 시퀀스에 감탄했고 '쓰리, 몬스터'의 손가락 쥬스만큼이나 기발한 그의 인체 도륙법을 보며(정확히 말하자면 사람 몸에 끈적끈적한 인화성 물질을 끼얹고 그 위에 다시 작은 콩(?)을 뒤집어씌운다음 불을 붙여서 콩과 함께 사람을 튀겨죽이는;;; 거였어요) 역시 박찬욱이야~! 라는 생각을 했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스토리 면에서도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기발한 트릭들이 많았어요. 아주 푹 빠져서 감상했고,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저 인간은 역시 저 물에서 노는 게 맞아. 저런 걸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창작활동을 한다는 건 팬으로서도 참 행복한 거지'같은 경외심 어린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요.
워낙 강렬한 창작품을 보고난 직후이기 때문에 깨어난 저는 깊은 카타르시스에 젖어있는 상태입니다.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하죠.


와, 진짜 엄청난 스토리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 조낸 부럽다....














    ......읭?


잠깐, 그 사람이라니? 이건 꿈이잖아. 꿈이잖아.


내가 꾼 꿈이잖아?!










시,.. 실로 엄청난 스토리였어. 그래, 분명 엄청난!!
샤말란의 싸다구를 날릴만큼 짜릿한 극적 반전과
봉테일 뺨치는 디테일한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스토리였다고!!
내가!!! 그런 걸 생각해냈다고!!!!



그런데 기억이 안 나....








그 엄청난 스토리가, 실은 내 머리속에서 나온
온전한 나만의 창작물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머리 속이 백지가 되어 버렸어........







.....안돼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기억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난 거였다는 것뿐.....






바로 어제도 이런 꿈을 꾸었지요.

크고 아름다우며 놀랍고 멍청한데다
슬프기까지 한 꿈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엄마, 저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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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LaJune 2008/03/31 01:33 # 답글

    흑흑... 꿀꽈배기님 얼음집에 오랫만에 와보니 아아주 슬픈 이야기가 올라와 있군요. 어쩐지 저도 같이 슬픕니다. 저 역시 스펙타클한 꿈을 잘 꾸고 깨면 거의 잊는지라... ㅠ_ㅠ
  • 키뮤 2008/03/31 01:42 # 답글

    현실에서 정말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나 어떤 이의 기억 속을 엿보는,
    그런 게 꿈이라는 가설도 있으니까요 :)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래서 흩어지는 걸지도,
  • 시니사군 2008/03/31 12:13 # 삭제 답글

    이제 감독 데뷔만 남으셨군요.
  • 처리니 2008/03/31 16:06 # 답글

    침대 옆에는 반드시 메모장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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