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질의 막장이 팬픽이라면 팬픽 중에서도 끝내주는 막장이 과거왜곡(망상) 계열이죠. 이건 특히 스토리텔링 포스가 흘러넘치는 작가의 작품인 경우 그 폐해가 더욱 막심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거든요. 2-3년 전에 강철의 연금술사 이슈발전 과거왜곡 팬픽을 쓰고 그 당시엔 꽤나 만족하며 뿌듯해했는데, 시간이 흘러 작가가 직접 이슈발전을 그려주니까 내가 끄적였던 그건.... 말 그대로 병신오브더이어, 더그리티스트병신오브올. 그 때 다짐했죠. 아직 작가가 그려주지 않은 과거만큼은 내 멋대로 왜곡해서 망치지 말자. 이건 정말 나중에 보면 자다가 허공에 발리슛을 2002번 날려도 해소되지 않을 수치플레이다. 하지만ㅡ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삶은 그 의미를...
(이럴 때만 신일숙 찾지 마라, 쫌, 야)
아시다시피 뭐, 은혼으로 인해 다시 '진리'를 열어버렸지요. 저 쪽 세계로 통하는 자판기 구멍에 노메이크업 얼굴을 들이밀었어요. 네르프 지하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뽑아들었네요. 소라치 미안, 나 이런 몸이 되어버렸어...... 아니, 실은 원래 그런 몸이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냥 생각을 포지티브하게 바꿨습니다. 이왕 쓸거면 확실하게 하자. 일단 시대배경이 되는 막말의 시대배경과 그 때의 문화와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은혼 캐릭터들의 원안이기도 한 주요 인물들에 대해사 공부 좀 해야겠다는, 예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죠. 요 2주일간 아래와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메이지 이야기 1
사전 이토 히로부미
인망력 - 사람을 이끄는 힘
CEO 경영전략
막말의 암살자들
직장인이 읽어야 할 101가지 실용서 목록에 올라있을 것 같은 저 'CEO 경영전략'이 대체 왜 끼어있냐 싶으시겠지만, 저게 좀 보물입니다. 지도자를 여럿 키워낸 억대연봉 스타강사 요시다 쇼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거든요. 인망력 역시 마찬가지. 신선조나 지사들 쪽이야 시바 료타로 소설을 좀 더 읽어봐야 명확한 이미지가 잡히겠지만, 위 책들만으로도 조슈번과 요시다 쇼인의 쇼카촌숙에 대해선 경험치 +50은 쌓은 듯 합니다.
아무래도 요시다 쇼인에 대한 일화는 그의 애제자인 다카스기 신사쿠를 중심으로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카스기의 요시다에 대한 감정 변화가 꽤 재미있더군요. 애초부터 다카스기는 무---------지하게 잘 나가는 집안의 되련님. 당연히 공부도 조슈번의 번교인 명륜관에 통학하고 있었고, 그 명륜관을 창설한 설립자는 다름아닌 다카스기의 친조부 되겠습니다. 그야말로 학교 이사장을 할애비로 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데다 머리도 명석하고 성격은 불같은 '졸라짱쎈 그 넘'이었던 게지요. 이에 비해 요시다 쇼인의 쇼카촌숙은 요즘으로 치면 '하자센터'같은 대안학교나 마찬가지로, 하급무사부터 일반 농민의 자식들까지 온갖 아웃사이더들의 집합소나 다름 없었습니다. 요시다는 자신 밑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자라면 누구든 받아들였죠.
그래서 처음엔 '요시다 쇼인? 그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듣보잡이냐' 싶어서 구경이나 한 번 하려고 친구 따라 쇼카촌숙에 갔던 다카스기는 그의 학식과 인품에 그만 숑 가버려서 위험한 자니 가까이 하지 말라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이면 밤마다 집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 넘고 물 건너... 는 아니고, 암튼 다리 하나 정도는 건너서 수업을 들으러 갔댑니다. 소년이 소녀경을 통해 천자문을 깨치고, 소녀가 비블로스를 통해 히라가나를 깨치듯이 본래 검술에 능할 뿐 성리학은 잘 몰랐던 다카스기의 학식은 쇼인을 만난 후 무섭도록 성장했다고 하네요. 특히 경쟁심이 강해,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또래애와 비교하여 경쟁을 붙여주면 미친듯이-_- 공부해서 기어이 따라잡고야 말았다고 합니다. 종국엔 타고난 리더쉽과 카리스마로 쇼카촌숙 학생 전체의 리더가 되었고요. (참고로 그의 넘버원 빠돌이가 바로 그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그에게 '히로부미'란 이름을 지어주었죠.)
음... 이건 그거네. '풋, 아이돌 따위 관심없어'라며 심드렁하던 친구 녀석한테 나홀로 공방가는 것만큼 뻘쭘한 짓도 세상에 없다며 사정사정해서 공방에 데리고 갔더니만 실물 보고 지가 숑 가버려서 밤낮 가리지 않고 팬사이트에 눌러붙어있는 건 기본이요, 결국 마음도 돈도 시간도 모두 오빠님에게 헌납해버린 몰입경보 진돗개3호 수위 빠순의 혐오스러운 일생... 그렇죠? 이건 그건데요.
그래도 그나마 다카스기가 나았던 점은 쇼인 역시 그를 편애했다는 거죠. 쇼인이 에도로 압송되어 처형당하기 직전 에도에 따라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다카스기라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그 때 쇼인이 유언처럼 다카스기에게 부탁했던 것이 존왕양이를 실행함에 있어 민중봉기의 선봉장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답니다. 후에 기병대를 만들어 역사에 중요한 점을 찍었으니 그로서는 선생의 유언을 완수한 셈이 되는군요. 하지만 사실 다카스기는 타고나길 부르주아에 오피니언 리더-_-였던지라, 요시다 쇼인에게 감화되어 쇼카촌숙 아웃사이더들의 리더 역할까지 도맡긴 했지만, 결국 죽는 순간까지 귀족 근성을 버리고 완벽하게 아웃사이더 세계에 편입하지는 못했다고 하죠.
이런저런 자료들을 읽다보니 요시다 쇼인이 시대를 앞서간 교육자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통일된 교과서 없이 학생 개개인이 공부하고 싶어하는 과목을 중점적으로 가르쳤으며 그 가르치는 방법 역시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 간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거나 심지어 밭을 갈고 건물 수리를 하는 등 실생활 속에서 끊임없는 교육 방식의 변화를 꾀하는 것은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 중에서도 특히, 요시다 쇼인이 혁명이란 몇몇 소수의 지식인들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민중 전체의 지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은 몇 십 년 후, 위로부터의 변혁을 시도했다가 3일 천하로 끝난 김옥균의 갑신정변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맹자를 공부하고 호연지기를 부르짖던 그 역시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무라이식 무사도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아무리 열린 사고방식의 교육자라고 해도 제국주의에 경도되었으며 일본서기같은 책을 근거로 정한론을 주장했던 그를 진정한 학자 혹은 철학자라 칭할 수는 없겠죠.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람이긴 하지만요.
덧1.
쇼인이 남긴 말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지사는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길가의 도랑과 골짜기에 자신의 시체가 버려질 수 있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다카스기 신스케의 도랑론(...)은 여기에서 비롯된 거였군요.
덧2.
자료를 뒤지다보니 '쇼인은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공부하세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구절이 있더군요.







덧글
2007/07/30 08:56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사나다 2007/07/30 15:49 # 삭제 답글
풉풉풉.......ㅎ 보는 동안에 몇 번이나 대폭소했습니다. 처음 수치플레이를 시작으로 한 번 뿜고-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D
루랑 2007/07/31 21:22 # 삭제 답글
......관대한 꽈배기님. 꽈배기님의 다정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저질렀다가 후회하고 있답니다. 김옥균이 쇼인의 밑에서 망명생활을 했다는 것은 씁쓸한 이야기에요. 훌륭한 지식인이고 혁명가였다지만 왜 하필 우리나라 잡아먹으려는 사람한테......아니, 이게 아니라...... 흐음....소라친의 은혼에서 ㄱㅊㄷ군이 쇼요센에게 숑 가있는 게 다 근거가 있었군요. (씨익) 경쟁심 많았다는 ㄱㅊㄷ(입에 붙었구만)같은 성격에 리더쉽 있는 귀족타입이란 것도 근거가 있었어요. 만세! 단순한 ㄱㅊㄷ은 아니었던거죠 신스케군은? >어째 점점 삼천포로 빠져듭니다.....
꿀꽈배기 2007/08/06 03:17 # 답글
비공개m님// 그런 비화가 또 있었군요! 역시 가츠라는 도망과 회피의 달인=_= 제가 읽은 책에서도 다카스기가 특히, 구사카와 비교를 하여 경쟁을 붙여주면 무서운 속도로 학업을 따라잡았다는 대목이 나와서 읽는 동안 슬쩍 웃었습니다. 은혼에서도 다카스기가 어리광부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저는 아직도 다카스기가 한 살이라도 연하일 거라 믿고 있다구요. 젭할... 소라친타마? ㅠㅜ사나다// 부끄럽습니다. ( __)
루랑// 그래서 모르는 게 약이라니깐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코믹이 되어가는 은혼이지만(특히 츠라-_-;) 캐릭터의 기본적인 성정이나 출신 배경같은 건 실존 모델에 거의 맞추는 것 같죠? 아, 그나저나 김옥균의 일본 망명 생활을 도운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라 알고 있습니다. 요시다 쇼인과 비슷한 사상을 가졌던 교육자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