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처녀권교정 지음 / 길찾기
나의 점수 : ★★★☆
허브에 연재되었던 킹교 트릴로지(라라미드 3부작이라 해야할까요?)의 마지막 작품 '왕과 처녀'가 드디어 단행본으로 묶여 발매되었습니다. 프롤로그와 본편 격인 '페라모어 스토리', '청년 데트의 모험'을 먼저 읽은 저로서는 이 작품이 메르헨 레이블로 발매된다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읽어보니 확실히 메르헨은 메르헨이로군요. 이 만화는 '용감한 영웅의 위대한 모험 이야기'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그러한 영웅심에 도취되어 애정과 모험에 대한 동경을 혼동하는 청년의 치기어린 호기로움 또한 가볍게 꼬집습니다. 아름답고도 꿈같은 이야기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동화 이면을 조명하여 전형적 선악구도를 전복시키고 모든 캐릭터들에게 서사와 설득력을 부여하는 점은 '메르헨, 백설공주의 계모에 관한'이나 '피터팬', '피리부는 사나이'등과 같지만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때로는 은근히 해피엔딩을 암시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 '왕과 처녀'는 독자들에게 명확한 결말 자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해피 엔딩이 아니며 또한 배드 엔딩도 아닌,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한 토막을 뚝 잘라 덜어낸 것만 같아 보이죠. 그리고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야기의 끝은 어쩌면 사실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장을 딱 덮으며 생각한 점은 크게 세가지였습니다.
첫째, 역시 내 생각대로 '왕비님 이야기'가 작가 권교정의 '바닥'이었음.
둘째, 작가가 '헬무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청년 데트의 모험'을 통해 일부 풀어낼지도 모르겠다.
셋째, 그리하여 '청년 데트의 모험'은 존내 길어지겠구나. (...님 건강염)
'왕비님 이야기'이후의 작품들에서 대단히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은 등장 인물들이 다시금 소통을 위한 노력을 보인다는 점이에요. 대놓고 로맨스인 '페라모어 스토리'는 물론이오, '왕과 처녀'의 늙은 왕 데트 또한 노이긴의 시대가 끝난 후엔 모든 일에 대한 집착과 의욕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그의 곁에는 친구 데어고어가 함께이며 알데히드 역시 완전히 데트를 떠난 것은 아니지요. 일단 알데히드를 맞이해 들였다는 자체가 데트로서는 마음의 벽 하나를 허문 셈이었으니까요. '마담 베리의 살롱'의 연재 중단 이후로 권교정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서로 간 소통조차 포기한 듯 무기력하며 허무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마치 작가 스스로의 심적 상태를 그대로 반영해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 많이 안타까웠는데, 이 3부작을 기점으로 조금씩이나마 작가도 캐릭터들도 다시금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아 진심으로 기쁩니다.
스토리 면에서는 이렇고, 작화 면에서도 주목할만한 점이 있는데-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사실적인 인물 뎃생입니다. 한 쪽 뺨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페라모어 스토리'의 헤다와 얼굴 반쪽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마법사 데어고어가 대표적인 케이스죠. 원래부터 미형 캐릭터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긴 했으나ㅡ데뷔작에서 이순재씨와 야자 깔만한 노친네의 젊은 시절 섹스 스캔들을 그토록 진지하게 그린 작가는 권교정밖에 없... (저 팬 맞습니다)ㅡ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추한 외양의 캐릭터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것은 작가에게도 처음이요, 순정만화계에서도 드문 일이 아닐까요. 또한 같은 노인이라고 해도 '헬무트'의 훼네스와 데트의 묘사는 많이 다르지요. 잇몸까지 보이도록 씩 웃는 입매라든가, 컨디션 안 좋은 노인네 특유의 심술궂은 표정같은 뎃생이 데트에선 훨씬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추한 부분을 대사나 나레이션뿐만이 아닌 그림으로도 묘사해낸다ㅡ 이것이 작가 권교정의 작품 연대기에 있어 어느 정도의 변화일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지만 꽤 의미있는 부분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마지막으로, 알데히드와 헨지는 비록 그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더라도 다시 만났을 것 같아요. 왼쪽 그림에서 이 순간만큼은 정말 서로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왔거든요. '페라모어 스토리'의 라자루스와 페라트도 그렇고. 권교정 작가의 요즘 그림에서는 상대방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이상하리만치 잘 살아있어요. 그래서 더욱 더 '청년 데트의 모험'이 기대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저 시니컬하고 노회한 늙은 왕 데트가 라자루스에게 푹 빠져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모습이 눈에 그려진단 말이죠. 후후후.
덧1.
정리해보면 라자루스의 첫사랑은 페라트. 어떤 이유에서인지 페라트를 잃고 마음을 닫아버린 라자루스는 데트의 첫사랑. 그리고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라자루스를 잃고(이 부분엔 무언가 큰 스토리가 있는 듯. 라자루스란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을 모두 없애버렸을 정도이니) 마음을 닫아버린 데트. 서로 쿵짝이 맞는다는 건 정말 우주적인 이벤트로군요=_= 물론 포어는 저런 데트의 마음을 알고도 결혼했겠지요. 과연 둘은 좋은 친구였을까요?
덧2.
데트가 헨지에게 유난히 심술을 부리는 것은 헨지의 모습이 젊은 시절의 스스로와 무척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모나 성격 이외의 어떤 것이요. 가장 가까운, 동경할만한, 사랑하는 동료인 줄 알았던 라자루스나 어둠이고 어둠이며 모든 불행의 시작인 노이긴.... 이 그 키워드일지도. 앞에서도 말했듯이 뻔한 메르헨의 전복은 작가의 전매특허니까요.
덧3.
알데히드는 권교정 만화 사상 으뜸 가는 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슴가는 부족하지만(..) 눈매라든가 목과 어깨선 같은 것이 정말 예뻐요.
덧4.
권말 부록을 보고나니 구시대의 연애소설 '카스카디아와 알데히드'가 읽고 싶어지는군요. 이웃나라 뷸트란에서는 금서로 지목된 이 책이 데트가 통치하는 유테일렌에서는 왜 왕실 안에 떡하니 비치되어 있는지, 충분히 알만합니다. 낄낄. 구시대라면 라자루스와 페라트가 있던 시대일텐데 페라모어에서 이에 관한 짤막한 언급이라도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덧글
2007/03/27 10:1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가즈 2007/03/28 23:32 # 답글
안녕하세요. 전 이 리뷰의 '왕비님 이야기가 작가 권교정의 바닥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 사고 버티던 왕비님 이야기를 사서 읽은 사람입니다. ....;; 왕과 처녀 단행본도 사서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니 꿀꽈배기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왜 진작에 왕비님 이야기를 사서 안 읽었는지 조금 후회되더군요. 청년 테드의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다는 사실도 이 글 덕분에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잡지연재를 떠나 웹연재로 가셔서, 찾아보기 전에는 그 행보를 잘 쫓아갈 수가 없어서 계속 놓치고 있었군요. 오랜만에 권교정의 신작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아직 읽진 않았어요. 단행본으로 나오는 걸 기다려서 읽고 싶은데 그러려면 너무 오래 걸리겠죠 그렇죠 완결 기다리려면 기약이 없겠죠....저도 '카스카디아와 알데히드'가 읽고 싶습니다! 등장인물의 성별 때문에 금서가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어리둥절했는데 조금 더 생각하니까 답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예전에 조금 읽었던 페라모어 이야기의 '라자루스'를 연결시키니 더 답이 나오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권교정이 그려주길 바라기 전에 테드의 모험이나 헬무트를 끝내주길 바라야 하기 때문에 기대는 안 하고 있지만요. ㅠ_ㅠ
꿀꽈배기 2007/03/30 19:44 # 답글
비공개ㅁ님// 그렇게 빠심이 절절히 드러나는 글이었나요, 아우 이거 춈 부꾸럽네요. ( __) 그다지 관심분야가 아니신데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진심으로 기쁩니다. 그 글은 저도 봤습니다. 아하하, 블로그 돌아다니다보면 참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엔 교집합이 많은 것 같아요.가즈// 안녕하세요 가즈님. 제 목표였던 세일즈 미션을 무사히 수행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저도 페라모어와 데트는 단행본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인터넷 연재분을 읽고 있는 독자로서 한말씀 드리자면, 이 작품들은 동시 연재분으로 보는 맛이 정말 남다릅니다! 물론 단행본으로 볼 땐 집중해서 보게 되는 등 연재분과는 또 다른 나름의 맛이 있겠지만요, 페라모어와 데트의 연재분이 새로이 업데이트 될 때마다 두 작품을 번갈아가면서 보면 매회 반전으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그나저나 카스카디아와 알데히드는 둘 다 여자이름 같지요?)
잠본이 2007/04/02 23:32 # 답글
개인적으론 '라라미드 사가'라는 제목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부로만 끝내는 건 너무 아까워서. (...네가 정녕 킹교님을 죽이려 하는게냐;;;)최고의 명대사는 역시 '혀! 혀가 들어갔어요...' (이런 바보커플 같으니라고 OTL)
시 2009/06/26 00:32 # 삭제 답글
왕비님 이야기가 '바닥'이었다는 데에 동감^^그리고 확실히 왕과 처녀를 보면서 그림에 감동을 했어요. 우왕. 2년도 지난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ㅎㅎ
꿀꽈배기 2009/07/06 02:10 #
제 감상에 공감해주시는 분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네요. :D 최근 교님의 그림은 그 안에 담겨있는 스토리를 차치하더라도 뎃생 그 자체로 정말 아름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