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년의 성장 : 대나무에 피는 꽃 by 꿀꽈배기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어느 것이 더 고결한가.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받아내며 그저 참고 견디는 것과
하고많은 세상의 고통과 맞싸워 이겨 고뇌를 끝장내는 것 중에서.


From [Hamlet] Act Ⅲ, Scene1


드라마 '궁'에서 그 어떤 캐릭터보다 지난한 갈등의 중심축에 있었던 캐릭터 이율은
결국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받아내며 그저 참고 견디는 것과
하고많은 세상의 고통과 맞싸워 이겨 고뇌를 끝장내는 것 중 후자를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극의 결말은 그 선택조차 온전한 이율의 것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지요.

아래의 리뷰는 2006년 백합갤(디씨 김정훈 갤러리)에서 출간한 이율 리뷰북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최종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썼던 글이라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는 정정하고 싶은 부분도,
덧붙이고 싶은 부분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으나 당시 느꼈던 날 것 그대로의 감상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어 원문 그대로 포스팅 합니다.




드라마 <궁>에서 테디베어를 이용한 엔딩 씬이 각 회마다의 내용을 정리하고 차회를 암시하는 교각이라면 채경, 신, 효린, 율 네 캐릭터의 개성이 돋보이는 궁의 오프닝은 드라마를 관통하며 아이들이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는 전도(全圖)와도 같습니다. 모양과 색은 제각기 다르지만 자신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소개되는 네 캐릭터의 타이틀은 결국 이 드라마가 아이들의 성장을 다루고 있으며 그 끝은 서서히 만개한 꽃송이처럼 긍정적일 거라는 암시를 주죠.

그런데 여기, 홀로 꽃잎이 아닌 새순을 틔우는 이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빨리 성장하지만 바로 그 조숙함 때문에 내부가 텅 비어버린ㅡ 대나무와 함께 등장한 '이율' 입니다.


황실과 채경의 친가를 작기 적색과 녹색 톤으로 연출해 두 가정, 나아가 신과 채경의 상반된 캐릭터를 대비시켰던 것처럼 율이 역시 어머니와 함께할 때와 채경과 함께할 때의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율과 혜정전의 장소가 실내/어둠/거울과 조명 등의 인공적 이미지라면 채경과 함께하는 곳은 실외/밝음/나무와 낙엽 등의 자연적 이미지로 정반대의 연출을 보여주고 있죠. 신에게 채경이 한 줄기 빛이라면 율에게 있어 채경은 그의 천국을 구성하는 제1요소인 나무와도 같습니다. 율이 읽고 있던 <나무를 심은 사람>에 대한 언급은 목가적 생활을 동경하는 율의 마음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장면에 앞서 혜정전이 민효린과 나누었던 카밀라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시켜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합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과 카밀라는 모두 고진감래의 대표적 인물이죠. 그리고 그것은 혜정전 모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어 하는 이상형이기도 합니다. 다만 혜정전의 나무가 '황위'라는 명확한 목표를 상징하고 있다면 율이의 나무는 단순히 '신채경'이라고 한정할 수만도 없는 복잡한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괴로워하는 채경을 바라보는 율의 얼굴과 어머니의 야욕으로 인해 스스로가 괴로워하는 율의 얼굴, 전혀 다른 두 상황에서 짓는 율의 표정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잠꼬대로 엄마를 찾으며 끙끙대는 채경을 바라보는 율의 표정은 단순히 걱정스러운 차원을 넘어서 괴로움에 울먹이는 듯이 보입니다. 눈매가 촉촉하죠. 율이는 어느새 저렇게까지 채경을 좋아하게 된 걸까요? 단순히 채경에 대한 율의 넘치는 애정으로만 해석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장면이죠. 그런데 사실 율의 이런 표정은 드라마 전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혜정전이 황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순간, 자신의 계획을 율에게 강요하는 때마다 율의 눈및은 저렇듯 불안하게 흔들리곤 했습니다.

신이 비뚤어지게 된 계기가 황후에 대한 애정결핍이라면 율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혜정궁의 과잉애정을 넘어선 집착장애입니다. "나보다는, 내 마음 속 기분보다는 엄마가 더 걱정되고 엄마의 마음의 고통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난 어떻게 돼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지금으로선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요." 라는 율의 대사가 현재 율이 안고 있는 갈등의 모든 것을 요약해주죠. 기본적으로 율은 황실 내부의 권력 쟁탈전에서 벗어나 변방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야에 묻혀 책이나 실컷 읽으며 평화롭게 지내는 '식물성 삶'을 동경한다면 동경하는 편이죠. 그러나 그의 곁에는 혜정궁이 있었습니다. 율은 권력의 중심에 서지못해 몇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한 어머니를 보며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도, 의지할 친지도 하나 없는 먼 이국 땅으로 쫓겨난 어린 율에게 어머니는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ㅡ 그야말로 The One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율은 14년 동안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황태자 교육을 받으며 어머니의 희망을 쫓아 한국에까지 돌아왔죠. 그러는 사이 율은 혜정궁의 의지가 아닌 자기 스스로의 의지라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의지를 구축할 수 있는 자유 자체를 차단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궁 안에 갇혀있지만 나름 비밀연애도 하고 클럽에서 친구들도 사귀는 신이보다도 자유의지를 억압당한 캐릭터라 할 수 있지요.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오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든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햇겠오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거울속의내가있오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오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율이 읊었던 이상의 시 '거울'에서 '거울'부분을 '엄마'로 바꿔서 읽어보면 어떻습니까. 엄마때문에 율은 엄마속의 나(황제가 된 율)를 만져보지(소통하지) 못하지만 엄마가 아니었던들 율이 어찌 황제가 된 자신을 만나보기라도 했겠습니까. 또 엄마 속의 율은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며 엄마 속의 율은 진짜 율과는 반대이면서도 또 꽤 닮은 모습입니다.

율은 엄마에 대한 연민과 애정, 그리고 또 다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엄마의 뜻에 따르면서도 이것이 과연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가. 나의 의지인가에 대해 끝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율 앞에 나타난 것이 채경입니다. 율이 만난 채경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명랑하게 웃는 얼굴에선 자신에게 없는 빛이 났죠. 만약 채경이 신과의 결혼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었더라면, 율은 그저 그런 형수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을 겁니다. 하지만 채경은 자꾸만 어두워져 갑니다. 율이 보기에 신과 황후는 채경을 너무나 함부로 대하고, 그런 궁 안에서 채경은 눈물로 시들어가죠. 채경의 밝음을 동경하던 율은 반대로 자유가 거세된 채경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때문에 궁 안에 갇힌 채 엄마도 만나볼 수 없어 괴로워하는 채경을 보며 율이 짓는 눈물은 스스로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 극 중에서 본격적인 계획에 들어가기 앞서 항상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던 율이 과감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채경에게 대쉬하는 순간은 모두 채경이 홀대당하며 억압받는 직후입니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황제라는 목표를 위해 제어당한 율은 자유롭게 살았지만, 그 어떤 나무보다도 크게 가지를 뻗으며 자랄 수 있었지만 정략결혼이라는 틀 안에 갇혀 시드는 채경을 보며 안타까움을 넘어선 동질감을 느끼죠. 율은 결심합니다. 비록 자기 자신은 차마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지만, 채경만큼은 자유롭게 만들어주겠다고.

그리고 이 과정만큼은 철저히 율의 의지로 완성되어야만 합니다. 신이 '스스로' 황위를 포기하고 채경을 '놓아주어'선 곤란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율은 다른 사람에 의해 해방되는 채경을 원치 않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채경을 억압에서 풀어주고 다시 활짝 웃는 채경으로, 싱싱하게 가지를 뻗는 나무로 '키워주기'를 갈망하지요. 이것은 엄마에 의해 제대로 크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는 스스로에 대한 보상심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채경을 향한 율의 고백은 채경의 어떤 점을 얼만큼 좋아한다가 아닌, 채경을 어떻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로 일관합니다. 명확한 목표가 생긴 율은 혜정궁을 대하는 태도 또한 변하죠. 요가센터에서 던지는 율의 대사엔 신이만을 향한 것이 아닌, 엄마를 향한 냉기도 서려있습니다. '그 땐' 엄마도 날 막을 수 없다는 말ㅡ 뒤집어보면 '지금까지는' 엄마에 의해 막혀왔다는 점을 어필하고 있죠. 또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수는 '내가' 쓰겠노라며 어느 때보다 강한 자신의 의지를 밝힙니다. 이즈음 율이 혜정궁을 부르는 호칭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화영씨에서 엄마로, 다시 엄마에서 어머니로. 어느새 모자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율이 채경에게 던진 이 한 마디는 그저 달콤한 사랑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제 율은 '정말로' 채경이 아프면 자신도 아프고, 채경이 괴로워하면 자신도 괴로울 정도로 채경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으니까요.

채경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깊어질수록 율의 화살은 신에게로 향합니다. 율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혜정전이라면 채경에겐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녀를 눈물짓게 만드는 신이 있죠. 신의 서툰 사랑법을 알 리 없는 율로선 한시라도 빨리 채경을 신의 곁에서 떨어트려 놓는 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19화에서 율은 채경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더 이상 울지 않도록 궁을 떠나.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네가 신이를 암만 좋아한다고 해도 넌 신이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상처투성이가 될 거야. 그러니까 도망가. 부서지기 전에." 자기 자신의 고통에서 우러나온 이 말은 완곡한 경고인 동시에 간절한 부탁이기도 합니다. 혜정전에게 갖고 있는 강렬한 독립욕만큼이나 애정 또한 버릴 수 없었던 율이기에 지금껏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바람대로 자라왔건만 그럴수록 어머니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먼발치로 달려가 조금만 더 노력해서 따라오라며 율을 부추겼습니다.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율은 채경만큼은 자신처럼, 나아가 혜정전처럼 망가져버리기 전에 궁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원하죠. 그것은 율 스스로가 조금씩 변질되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텅 빈 공연장으로 향한 신을 바라보던 채경에게 율은 어두운 곳에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다며 따라 들어가 볼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자연을 사랑하고 빛과 바람을 동경하던 율의 성격이 아니죠. 오히려 이 대사는 채경모와 마주한 자리에서 혜정전이 피력했던 인생관과 부합합니다. "어둠이 있으면 어둠을 즐기기도 하고, 비가 오면 비를 온전히 맞는 것이 인생의 묘미"라던 대사 말이죠. 서서히 혜정전의 어두움에 잠식당하는 율의 내적 변화는 극이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줄곧 암시되어오던 부분입니다. 탁 트인 실외에서 나누던 울과 채경의 데이트는 빛이 차단된 연극 무대 등의 실내로 그 배경이 바뀌었고, 율이 채경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시공간 역시 어두운 밤 혹은 자동차 내부처럼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 장소로 일관합니다.

비단 채경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뿐만이 아니죠. 율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선홍색 조명 아래 펼쳐진 익위사 백충화와의 첫 대면 씬입니다. 공식 홈페이지 대문의 주연 4인방 소개 플래시를 보면 율의 설정 중엔 그가 철저한 채식주의자이며 고기를 먹으면 동물들의 공포와 분노가 몸에 쌓인다고 믿는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듯 채경과 함께 바오밥 나무를 보러가기 위해 율이 손수 만든 도시락 반찬에선 그 흔한 소시지나 햄 하나 찾아볼 수 없었죠. 그랬던 율이 고기, 그것도 날 것 그대로의 '남의 살'을 씹어 삼킨다는 것은 앞으로 휘몰아칠 정쟁의 피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인 동시에 타인의 부정적 에너지ㅡ분노, 슬픔, 공포ㅡ를 취하여 지금껏 피해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포지션을 가해자로 전복시켜보려 하는 위악적 행동이기도 합니다.

율의 캐릭터 구축에 있어 항상 아쉬었던 점 중의 하나가 율에겐 좀처럼 적절한 소품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예를 들어 신의 경우, 고독이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할 때 백 마디 대사보다도 알프레드를 만지작거리거나, 시선을 돌리며 이어폰을 귀에 가져가 꼽거나 하는 동작만으로도 신의 캐릭터를 살려줄 수 있거든요. 효린에겐 무용이 있습니다. 음악도 울려 퍼지지 않는 연습실에서 콧노래로 자체반주하며 발레에 몰두하는 장면은 대사 하나 없지만 효린의 내재된 고독과 그것을 감추기 위해 드높이 쌓아올린 자존심을 직관적으로 전달해 주죠. 그런데 율에겐 그의 심리를 대변해 줄 만한 상징물이 없습니다. 초반부에 '뿌리 있는 식물'이 언급된 적은 있지만 그게 직접적으로 율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주진 못했죠. 덕분에 율의 심리는 오로지 대사를 통해서만 시청자들에게 전달됩니다. 듣는 입장에선 감정 덩이리들이 너무나 정직하게 다가오니 공감하기 '힘들고', 하는 입장에선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죠'.), 이 장면은 드라마 <궁>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꼽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설정 연출과 연기가 그간의 목마름을 단번에 해소시켜줄 만큼 훌륭했습니다. 상하관계의 역학을 즐기는듯한 표정으로 하수인을 내려다보며 율이 짓던 고소(苦笑)는, 지금껏 유약해보일 만치 상냥한 얼굴로 채경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던 소년이 육신을 씹어내는 의지로 만들어낸 이미지의 반전이기에 그 어떤 스토리상의 반전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이후 확고해진 율의 의지는 가면파티 시퀀스에서 더욱 잘 살아나죠. 드라마 <궁>에서 가면은 등장인물, 특히 신을 타인과의 소통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소품으로서 꾸준히 기능해왔습니다. 본디 가면이라는 것은 사람의 진심을 감추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얼굴만을 보여주는 '페르소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배우들이 쓰고 연기하던 가면에서 비롯된 단어인 페르소나(Persona)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낸 사회적 자아로서, 진실 된 내면의 얼굴인 이고(Ego)와 반대되는 개념이죠. 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채경과 둘만 있는 자리에선 가식의 가면을 벗고 맨얼굴로 소통하는 점은 페르소나와 이고, 율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이자 가장 근원적인 내부의 분열을 극명히 대비시킴과 동시에 그래도 채경에게만큼은 어느새 어둠을 즐기게 된 '머리'가 아닌, 여전히 따스한 온기를 갈구하는 '가슴'을 맞대고 가식 없이 고백한 율의 진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율의 마음은 언제까지 진실성을 보존할 수 있을까요? 또 채경은 언제까지나 궁 안에서 그 순수를 지킬 수 있을까요? 율은 회의적입니다. 누구에게나 사근사근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늘 허무주의적 냉소를 품어오던 율입니다. 이것은 제가 율이를 지켜보며 쭉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모난 성격도 아닌데 어째서 율은 채경을 만나기 전까지 친구 하나 없는 고독을 즐기고 있었을까. 부모로부터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에 굶주려있던 신이조차도 그의 어두운 면을 공유할 수 있는 민효린이라는 친구 하나쯤은 옆에 두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의 실마리는 19화에서 채경이에게 던진 한 마디를 통해 찾을 수 있었죠. "시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멈춰. 아무리 특별한 시간이라 해도. 그리고 그 시간이 멈추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을 거야."

이 장면에 앞서 율은 채경에게 10여년 가까이 마음속에 지녀왔던 생채기 하나를 보여줍니다. 열 살 때 목격한 엄마의 자살에 대한 기억이 그것이죠. 차마 채경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녀의 등 뒤에서 고해성사하듯 읊조리던 율의 떨리는 목소리엔 지금까지도 심신을 지배하고 있는 당시의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만, 제가 그 장면을 압도하고 있는 진짜 공포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그것이 율에게 있어 단지 '최초'의 경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였습니다. 네, 유년기의 율이 겪었던 끔찍했던 기억들은 '단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혜정전이 시도했던 수차례의 자살 기도 중 맨 첫 번째일 뿐이죠. 갑작스레 아버지를 잃고 쫓기듯 영국으로 떠나갔던 율의 나이는 다섯 살. 많이 혼란스럽고 슬펐을 테지만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성장속도만큼이나 빠른 회복력으로 마음을 추슬렀을 겁니다. 싹싹하고 총명한 율에겐 친구도 여럿 있었을지 모르죠. 그렇게 5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이번엔 단 하나 남은 가족이자 율의 행복이었던 엄마가 자살을 시도합니다. 희망 그리고 절망. 또, 또 다시ㅡ 율의 시간은 반드시 멈추었습니다. 아무리 특별하고 행복한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이 멈추고 난 뒤엔 자그마한 손톱을 세우고 애써 그러모았던 행복들도 물거품처럼 사라졌죠. 때문에 채경에게 건넨 위 대사는 율 스스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진심어린 조언이자, 율의 성장을 제한하고 있는 가장 강렬한 트라우마입니다.

율은 사랑의 영속성을 믿지 못합니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정서는 '허무'죠. 제아무리 애절한 사랑도, 벅찬 행복도, 넘쳐 흐르는 기쁨도 반드시 그 끝엔 이별과 절망과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불행은 아 이쯤이면 됐을 거야, 이번만큼은 날 빗겨갔겠지, 라며 마음을 놓는 바로 그 순간 찾아온다는 것을 십몇 년에 걸쳐 체득했으니까요. 앞서 말한, 황위에 오를 것을 다짐하며 날 것을 씹어 먹던 장면에서조차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 위에 기꺼이 올라탄듯한 비장미가 느껴지는 것은 무사히 황제에 등극한다 해도 짧은 희열 후에 반드시 찾아올 비극을 스스로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율은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순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현명치 못한 판단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이거나 채경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율은 실행합니다. 충동적이죠. 본능적이고요. 이러한 경향은 혜정전이 원한, 차갑게 식은 머리로 계획을 진행시키는 황위 문제보다 오로지 율의 순수한 감정에 따르는 채경과 관련된 일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친구가 아닌 남자로서 채경에게 건넨 첫 고백에서 율은 강조합니다. 내게 와주어서, 내 운명이 돼주어서 고맙노라 '한 번은' 말하고 싶었다고. 자신과 채경의 관계에 지금이 아닌 다음이란 영원히 없을 지도 모르니까요. 율에게는 매 순간이 행복의 종막입니다.


많은 애청자들이 세 아이들의 성장, 그 중에서도 특히 율의 성장에 관해 깊은 의문과 걱정을 품고 있습니다. 남자주인공의 연적이자 서브캐릭터라는 태생적 한계로 결국 사랑을 쟁취하지 못할 운명의 이율. 곁에 자리한 채경으로 인해 성장할 신이와 달리 율은 채경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걸까요? 그는 오롯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 하는 걸까요?

저는 엄마의 자살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는 율을 보며 가슴 짠했던 반면 작은 안도감 또한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 못한 상처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꺼내 보였다는 사실 하나가 율에겐 대단히 긍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진정한 파멸이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상처에서 비롯되는 거니까요. 당시의 사건에서 율이 받은 상처는 단지 엄마가 자신을 떠나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엄마를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지 못했다는, 마음이 병든 엄마를 구원하지 못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또한 십여년 가까이 율의 가슴을 아물지 못하게 만든 요인입니다. 채경과의 짧은 대화는 그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고백성사와도 같았습니다. 언어란 희미하게 떠돌던 감정을 뚜렷한 형태로 구체화시키는 수단입니다. 목소리를 내어 실체화 된 율의 상처와 마주한 것은 채경만이 아니었죠. 늘 가슴 속에 품고 있었으나 공포와 죄책감에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스스로의 상처를 율은 비로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적'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만큼 미지의 공포는 사그라집니다. 트라우마의 무게 역시 한결 가벼워지겠죠. 고백 전 요가센터에 반듯이 누워있던 엄마를 보고 과거의 기억을 반추해내며 울먹이던 것에 비해, 고백 뒤 혼절한 엄마가 정신을 차린 후에도 채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꿋꿋이 피력하는 율의 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 긍정적 변화입니다.


대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화시기가 불규칙할뿐더러 그 종류와 생태환경에 따라 짧게는 십수 년에서 길게는 백여 년까지 걸릴 만큼 인내를 요하기 때문이죠. 그런 대나무가 오랜 결실을 맺어 꽃을 피울 땐 대밭 전체가 동시에 개화하여 한꺼번에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조만간 시들 것을 알면서도 그 지난한 계절을 지나 꽃이 피는 이유는 새로운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겠지요. 지금의 나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더욱 더 견고하고 키가 큰 나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피 흘리며 쓰러진 엄마 앞에서 그저 무기력한 어린아이였던 율은 이제 성인의 문턱에 서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채경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비록 그것이 오히려 채경을 힘들게 만든 신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게 될지라도 채경에게 내밀었던 손 안의 의지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율의 것이었습니다. 채경은 율의 손에 따스한 온기만을 남긴 채 신의 손을 잡고 나아가겠지만, 떠나간 채경의 마음에 과거의 상처를 나눠보낸 율은 이제 깨달아갈 수 있겠지요. 사랑이란 행복이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또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가질 수 있는 행복과 사랑은 단 하나가 아님을. 몇 번을 잃어버릴 지라도 다시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또 다른 행복과 악수할 수 있음을. 스스로 자리를 떠나지 않는 한 종막과 서막이 끝없이 교차하며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임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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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소리 2009/05/04 00:15 # 삭제 답글

    와, 이게 언제적 궁, 언제적 율, 언제적 이야기에요.... 참 감회가....
  • 꿀꽈배기 2009/05/04 09:44 #

    김정훈씨 입대 기념 포스팅...... 이라 말하고 싶지만 이미 그 타이밍에도 늦은 것 같고. 하하;
    예전부터 블로그에도 올려야지 올려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문서로 저장해놨던 파일이 삭제되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이제서야 책 보며 직접 타이핑을 했네요. 벌써 3년 전 드라마라니 세월이 너무 빨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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